'벽이'는 재현이의 단 하나밖에 없는 친구이다. 재현이만이 볼 수 있는 볼록하게 만져지는 벽지 속 사내아이. 재현이는 '벽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리고 '벽이'에게 늘 이야기한다. 재미있는 이야기, 속상한 이야기, 화난 이야기, 우스운 이야기…, '벽이'는 재현이가 무슨 말을 하든지 못 알아듣겠다고 되묻지도 않고 끝까지 재현이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참 좋은 친구이다.
왜 재현이에겐 벽이만이 좋은 친구일까. 다섯 살 때 열병을 앓아 장애가 있는 재현이. 다른 사람들한테 자신의 생각을 말해 본적이 없다. 사람들 앞에서 재현이의 입술과 혀는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재현이는 스스로를 방안에 가두어 버린다. 그리고 벽이와의 생활에 길들여진다.
창작동화 <벽이>. 이 책 속엔 재현이를 대하는 엄마와 다현이가 무척 다른 시선을 가졌음을 느낄 수 있다. 장애를 가진 재현이를 오로지 보호본능만으로 마음을 다하는 엄마. 행여나 어딘가에 부딪혀 다치기라도 할까 늘 노심초사하고 모든 면에서 부족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 부족한 면을 당연히 엄마가 채워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현이. 재현이의 쌍둥이 동생인 다현이는 재현이의 장애가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과 조금 다르다고 생각할 뿐이다. 바로 맑고 순수한 눈높이로 바라보는 사심 없는 마음 때문이다. 또래 아이들처럼 재현이를 놀리기도 하고 뭐든지 먼저 차지하려 떼를 쓰기도 하고 또래들처럼 싸우기도 한다.
그렇다면 엄마와 다현이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혹시 편견은 아닐는지 짐작해본다. 장애아이니 당연히 특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엄마의 마음이 편견과 연결고리를 같이 하고 있음에 재현이가 자꾸만 방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음은 아닐까.
남들의 시선을 우려하는 엄마. 남들과 부대끼지 않으면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엄마. 그렇다면 방 안에 갇혀 오로지 벽이만을 향해 세상이야기를 해야 하는 재현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특수학교에 다니는 재현이가 여름방학을 맞는다. 선생님은 재현이에게 방학숙제를 꼭 해오라 몇 번이나 당부한다. 숙제는 달랑 두 가지. 문제집 두 권 풀기와 극장에서 영화보기. 하지만 재현이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오라는 두 번째 숙제가 영 마음에 걸린다. 엄마는 재현이를 향해 말씀하신다.
"너희 선생님은 뭐 이런 숙제를 내주고 그런다니? 그냥 집에서 비디오로 봐. 너를 데리고 어떻게 극장을 간다고 그래?"
하지만 다현이는 달랐다.
"와! 오빠는 숙제가 극장에 가서 영화 보는 거야? 진짜 좋겠다. 엄마, 나도 오빠 갈 때 같이 데려가 주라. 응?"
하지만 엄마는 끝내 재현이를 극장에 데려가지 않았다. 그리고 휠체어를 탄 재현이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현이만 데리고 할아버지 댁으로 여름휴가를 떠나게 된다. 외할머니 댁으로 떠나기 전 재현이는 벽이를 향해 울부짖는다.
"왜 나보고만 양보하래? 학교에서 현장학습 갔을 때 식당에서 사람들이 자리 양보 안 해주면 장애인들에게 양보도 할줄 모르는 고약한 사람들이라고 그러면서. 왜 집에서는 늘 나보고만 양보하래?"
어느 날. 재현이는 세상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한다. 재현이를 세상 밖으로 데려다 주려 하는 것은 바로 전동휠체어. 재현이의 특수학교 담임선생님은 재현이에게 전동휠체어를 빌려주며 운전연습을 시킨다.
학교와 집밖에 모르던 재현이. 드디어 전동휠체어를 타고 거리로 나서게 된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물건을 사고… 재현이는 벅찬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 벽이를 향해 쉴 새 없이 떠들어 댄다.
"벽아. 내일부터 나 혼자 전동휠체어 탄다. 너 내가 전동휠체어 타는 거 한번도 못 봤지? 히히, 실은 나 운전 잘 못해.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게 꼭 술 취한 사람 같애. 그래도 한 달 동안 연습해서 많이 늘었어. 날마다 연습하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너도 타 보고 싶지?"
그러던 중. 담임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전동휠체어를 타고 붕어빵을 사러 나간 재현이를 길가에서 잠시 스친 아주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옷을 털어 낸다. 마치 나쁜 병에라도 옮긴 것처럼, 그 모습을 본 엄마는 선생님께 말한다.
"세상에 이런 애를 혼자 길거리에 내보내 놓고 무슨 일이 없기를 바라셨어요? 누가 우리 애 붕어빵 심부름 시키라고 했어요? 애 혼자 밖에 나가서 어떤 대접을 받고 다니는지 알기나 하세요? 그러다 진짜 무슨 일이라도 나면 선생님이 책임지실 거예요?"
결국 엄마는 재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일주일. 재현이는 벽이를 향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나도 처음엔 속이 상했어. 사람들이 흘낏거리면서 나를 바라보는 것도 다 알아. 하지만 그건 그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거라고 그랬어.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니잖아. 그날도 그래. 잘못한 건 그 아주머닌데 왜 내가 학교도 못 가고 이렇게 벌을 받아야 해? 난 아무 짓도 안했잖아."
벽이를 향해 쉴 새 없이 이야길 해대는 재현이는 다현이의 다그침으로 마침내 엄마에게 마음속 이야기를 하게 된다. 학교에 가고 싶다고. 전동휠체어 타는 게 너무 좋다고. 사람들이 쳐다봐도 괜찮다고. 그건 그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런 거라고.
재현이의 홀로서기는 그렇게 시작이 되고 있었다. '벽이'를 향해서만 마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 엄마를 향해, 또 세상을 향해 재현이는 드디어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벽이>를 쓴 작가 공진하. 그는 12년 동안 장애 아이들과 동고동락을 함께 해온 특수학교교사이다. 그래서일까. '벽이'를 향한 재현이의 속 깊은 이야기가 가슴을 저미듯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음에 큰 감동을 받았다.
작가는 '벽이'를 통해 장애아들을 그 어떤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존재 자체로서 순수하게 인정하기를 바라고 있다.
"저는 특수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도 잘 못하고 잘 걷지도 못하니까 남들과 다른 점이 참 많은 아이들이지요. 하지만 이 아이들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습니다. 칭찬받으면 좋아하고, 친구들 앞에서 우쭐대고 싶어 하고, 극장에서 영화도 보고 싶고, 하루 종일 집안에 있는 것보다는 바깥에 나가서 마음껏 뛰어 놀고 싶어 하고…. 이 책을 읽고나서 나와 다른 친구들을 만나 마음의 문을 열고 함께 놀아 보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면 나와 똑같은 친구의 모습을 꼭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가슴 한 켠으로 스치는 스산한 바람에 오돌오돌 소름이 돋는다.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행여 우연이라도 그들과 마주했을 지난 어느 시간에 내가 그들에게 보낸 눈길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장애를 가졌다는 것이 장애를 가지지 않은 나로 하여금 혹시 그 어떤 우월감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을까.
삶을 채워가는 노력은 누구에게나 한결같을 것이다. 성치 않은 육신을 가졌다하여 그들이 채워가는 삶조차도 성치 않다 치부해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더 열정적인 삶을 채우려 노력할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 '벽이'가 되어보면 어떨까. 또는 다현이를 닮아보면 어떨까. 기쁨도 슬픔도 그저 묵묵하게 들어주는 '벽이'처럼, 특별한 시선이 아닌 오로지 순수하고 맑은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다현이처럼….
이 세상에 '벽이'와 다현이가 많아질수록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재현이들은 보다 더 행복해질 것이라 감히 짐작해본다.